사회 · 번역

#가속하라 ― 가속주의 정치를 위한 선언

미래는 취소되었다고 이 선언은 말하고, 그러니 미래를 다시 열어젖히자고 말한다.

알렉스 윌리엄스, 닉 스르니체크2026. 7. 30.
사이버신 프로젝트 관제실을 재현한 컴퓨터 그래픽
본문에 나오는 칠레 사이버신 프로젝트의 관제실. 사진이 아니라 컴퓨터로 재현한 이미지다. Rama, CC BY-SA 3.0 FR

01. 서론: 국면에 대하여

1. 21세기의 두 번째 십 년이 시작되는 시점에 지구 문명은 새로운 종류의 대재앙을 마주하고 있다. 다가오는 이 파국들은 국민국가의 탄생과 자본주의의 부상, 유례없는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 속에서 벼려진 정치의 규범과 조직 구조를 조롱한다.

2. 가장 중대한 것은 행성 기후 체계의 붕괴다. 시간이 흐르면 이는 현재 지구 인구의 존속 자체를 위협한다. 인류가 마주한 위협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이지만, 그보다 작되 잠재적으로는 그만큼 불안정을 초래할 문제들이 그 곁에서 그것과 교차하며 존재한다. 특히 물과 에너지 자원의 고갈은 대량 기아와 경제 패러다임의 붕괴, 새로운 열전과 냉전의 전망을 내놓는다. 계속되는 금융 위기는 정부들로 하여금 긴축, 사회복지 서비스의 민영화, 대량 실업, 임금 정체라는 마비적인 죽음의 소용돌이 정책을 끌어안게 했다. '지적 노동'을 포함한 생산 과정의 자동화 확대는 자본주의의 만성적 위기를 보여 주는 증거이며, 머지않아 자본주의는 북반구의 옛 중산층에게조차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해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3. 끊임없이 가속하는 이 파국들과 대조적으로, 오늘의 정치는 다가오는 절멸에 맞서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사회를 변형시키는 데 필요한 새로운 관념과 조직 양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위기가 힘과 속도를 더해 가는 동안 정치는 시들고 물러난다. 정치적 상상력의 이 마비 속에서 미래는 취소되었다.

4. 1979년 이래 헤게모니를 쥔 지구적 정치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였고, 주요 경제 대국 어디서나 그 변종을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지구적 문제들이 신자유주의에 제기하는 깊은 구조적 도전에도, 무엇보다 2007~8년 이래의 신용·금융·재정 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오직 심화되는 방향으로만 진화해 왔다. 신자유주의 기획의 이 연장, 곧 신자유주의 2.0은 또 한 차례의 구조조정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형태는 사회민주주의 제도와 서비스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민간 부문의 새롭고 공격적인 침투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런 정책이 당장 부정적인 경제적·사회적 효과를 낳는데도, 새로운 지구적 위기가 더 긴 시간에 걸쳐 근본적인 장벽을 세우는데도 그렇다.

5. 우파 정부와 비정부기구와 기업 권력이 신자유주의화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좌파에 남아 있는 것들 대부분이 계속 마비되어 있고 무력한 탓이다. 삼십 년의 신자유주의는 대다수 좌파 정당에서 급진적 사유를 앗아 갔고, 속을 비워 놓았으며, 대중적 위임을 잃게 했다. 잘해야 그들은 지금의 위기에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돌아가자는 요구로 대응했다. 전후 사회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바로 그 조건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대규모 산업적 포드주의 노동으로 명령 한마디에 돌아갈 수 없고, 애초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남아메리카 볼리바르 혁명의 신사회주의 정권들조차, 동시대 자본주의의 교리에 저항하는 능력은 고무적이지만, 20세기 중반의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실망스럽다. 신자유주의 기획이 초래한 변화로 체계적으로 약해진 조직 노동은 제도 차원에서 경화되어 있고, 잘해야 새로운 구조조정을 조금 완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를 세울 체계적 접근도, 그런 변화를 관철할 구조적 연대도 없는 지금, 노동은 상대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냉전 종식 이후 등장해 2008년 이후 다시 힘을 얻은 새로운 사회운동들 역시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전망을 고안해 내지 못했다. 그 대신 이들은 전략적 효과보다 내부의 직접민주적 절차와 정서적 자기 가치화에 상당한 에너지를 쓰며, 지구화된 자본의 추상적 폭력에 공동체적 직접성이라는 취약하고 덧없는 '진정성'으로 맞서려는 듯 신원시주의적 지역주의의 변종을 자주 설파한다.

6.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적·정치적·조직적·경제적 전망이 없다면 우파의 헤게모니 권력은 어떤 증거 앞에서도 자신들의 편협한 상상을 계속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잘해야 좌파는 한동안 최악의 침투 일부를 부분적으로 막아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끝내 거스를 수 없는 조수 앞의 카누테 왕이 되는 일이다. 새로운 좌파의 지구적 헤게모니를 만들어 내는 일은 잃어버린 가능한 미래들을 되찾는 일, 나아가 미래 그 자체를 되찾는 일을 뜻한다.

02. 공위기: 가속주의들에 대하여

1. 가속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온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신진대사는 경제 성장을 요구하며, 개별 자본 주체들 사이의 경쟁은 경쟁 우위를 차지하려는 시도 속에서 기술 발전을 점점 더 밀어붙이고, 그 모든 과정에 사회적 탈구가 늘어난다. 신자유주의 형태에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표상은 창조적 파괴의 힘을 해방하고 끊임없이 가속하는 기술적·사회적 혁신을 풀어놓는다는 것이다.

2. 철학자 닉 랜드가 이를 가장 예리하게 포착했다. 자본주의의 속도만으로도 유례없는 기술적 특이점을 향한 지구적 이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근시안적이지만 최면적인 믿음을 통해서였다. 자본을 이렇게 상상할 때 인간은 결국 폐기될 수 있다. 이전 문명의 파편을 주워 모아 스스로를 빠르게 구축해 가는 추상적 행성 지능에 걸리적거리는 짐일 뿐이므로. 그러나 랜드식 신자유주의는 속도와 가속을 혼동한다. 우리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지 모르나, 결코 흔들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매개변수의 엄격한 집합 안에서만 그렇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국소적 지평의 증가하는 속도, 곧 단순하고 무뇌아적인 돌진일 뿐, 항해이기도 한 가속, 보편적 가능성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적 발견의 과정이 아니다. 우리가 본질적이라 여기는 것은 후자의 가속이다.

3. 더 나쁜 것은, 들뢰즈와 과타리가 알아본 대로, 자본주의의 속도는 처음부터 한 손으로 탈영토화한 것을 다른 손으로 재영토화한다는 점이다. 진보는 잉여가치와 산업예비군과 자유롭게 떠도는 자본의 틀 안에 갇힌다. 근대성은 경제 성장의 통계 수치로 환원되고, 사회적 혁신에는 공동의 과거에서 온 키치한 잔여물이 눌어붙는다. 대처와 레이건의 규제 완화는 빅토리아식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가족·종교 가치와 사이좋게 나란히 앉는다.

4. 신자유주의 내부의 더 깊은 긴장은 자기 이미지에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근대성의 운반체로, 말 그대로 근대화와 동의어로 내세우면서, 구조적으로 제공할 수 없는 미래를 약속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진행되면서 개인의 창조성을 가능하게 하기는커녕 인지적 창의를 없애고 그 자리에 각본화된 상호작용의 정서적 생산 라인을 놓는 쪽으로 기울었다. 지구적 공급망과 신포드주의적 동아시아 생산 지대가 거기 결합되었다. 소수의 엘리트 지식 노동자로 이루어진 '인지 계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으며, 알고리즘 자동화가 정서 노동과 지적 노동의 영역까지 파고들면서 그 속도는 더 빨라진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필연적 역사 발전으로 상정했지만, 실은 1970년대에 나타난 가치의 위기를 막아 내기 위한 우연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위기의 궁극적 극복이 아니라 승화였다.

5. 랜드와 더불어 전형적인 가속주의 사상가로 남아 있는 이는 마르크스다. 너무나 익숙한 비판과 달리, 심지어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자 일부의 행태와도 달리, 우리는 마르크스 자신이 자기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변형하려는 시도 속에서 당대 가장 앞선 이론적 도구와 경험적 자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근대성에 저항한 사상가가 아니라 그것을 분석하고 그 안에 개입하려 한 사상가였으며, 착취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그때까지 가장 앞선 경제 체계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성취는 되돌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 형태의 제약 너머로 가속시킬 것이었다.

6. 실제로 레닌조차 1918년의 글 「좌익 소아병」에서 이렇게 썼다.

사회주의는 근대 과학의 최신 발견에 기초한 대규모 자본주의적 공학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수천만의 사람들을 생산과 분배의 통일된 기준에 가장 엄격하게 따르도록 하는 계획적인 국가 조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이것을 말해 왔으며, 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과 이 초라도 이야기하며 보낼 가치는 없다.

7. 마르크스가 알고 있었듯 자본주의를 참된 가속의 행위자로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좌파 정치가 기술사회적 가속과 대립한다는 평가 또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심각한 왜곡이다. 실제로 정치적 좌파에게 미래가 있으려면, 그것은 억눌려 온 이 가속주의적 경향을 최대한 끌어안는 미래여야 한다.

03. 선언: 미래에 대하여

1. 우리는 오늘날 좌파에서 가장 중요한 분할선이 지역주의와 직접행동과 집요한 수평주의를 고수하는 쪽과, 추상·복잡성·지구성·기술의 근대성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정치, 곧 가속주의 정치라 불려야 할 것을 그려 내는 쪽 사이에 있다고 본다. 전자는 비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작고 일시적인 공간을 만드는 데 만족하며, 본래 비지역적이고 추상적이며 우리의 일상 기반시설 깊숙이 뿌리내린 적을 마주할 때 따라오는 실제 문제들을 회피한다. 그런 정치의 실패는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었다. 반면 가속주의 정치는 후기 자본주의의 성취를 보존하면서도 그 가치 체계와 통치 구조와 대중적 병리가 허용하는 것보다 멀리 나아가려 한다.

2. 우리 모두는 덜 일하고 싶어 한다. 전후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가 계몽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노동시간의 급진적 단축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물음이다. 1930년에 쓴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케인스는 개인의 노동이 하루 세 시간으로 줄어드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내다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것은 일과 삶의 구분이 점진적으로 소멸하는 일이었고, 노동은 떠오르는 사회적 공장의 모든 국면에 스며들게 되었다.

3. 자본주의는 기술의 생산력을 제약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것을 불필요하게 좁은 목적으로 몰아가고 있다. 특허 전쟁과 아이디어 독점은 자본이 경쟁을 넘어서야 할 필요와 기술에 대한 자본의 점점 퇴행적인 태도를 동시에 가리키는 동시대의 현상이다. 신자유주의의 제대로 된 가속적 성취는 더 적은 노동이나 더 적은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았다. 우주여행과 미래 충격과 혁명적 기술 잠재력의 세계 대신, 우리는 조금 나아진 소비자 기기만이 발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같은 기본 제품의 집요한 반복이 인간의 가속을 대가로 한계 소비 수요를 지탱한다.

4. 우리는 포드주의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포드주의로의 복귀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질서 잡힌 공장 환경이라는 생산 패러다임을 전제로 했다. 거기서 (남성) 노동자는 평생에 걸친 지루함과 사회적 억압을 대가로 안정과 기본적 생활 수준을 받았다. 그런 체계는 식민지와 제국과 저개발 주변부라는 국제적 위계, 인종주의와 성차별이라는 국가적 위계, 여성 종속이라는 경직된 가족 위계에 기대고 있었다. 많은 이가 향수를 느낀다 해도, 이 체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5. 가속주의자들은 잠재된 생산력을 풀어놓고자 한다. 이 기획에서 신자유주의의 물질적 플랫폼은 파괴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공동의 목적을 향해 용도를 바꿔야 한다. 기존 기반시설은 부숴야 할 자본주의의 무대가 아니라 탈자본주의로 도약할 발판이다.

6. 기술과학이 자본주의의 목적에 예속되어 온 사정을 (특히 1970년대 후반 이래) 생각하면, 근대의 기술사회적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분명 아직 알지 못한다. 이미 개발된 기술 안에 어떤 미개척 잠재력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 가운데 온전히 아는 이가 있는가? 우리의 내기는, 우리의 기술·과학 연구가 지닌 참된 변형의 잠재력 상당 부분이 아직 활용되지 않은 채, 지금은 잉여로 보이는 특성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근시안적인 자본주의적 사회체를 넘어서고 나면 그것들은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7. 우리는 기술 진화의 과정을 가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기술 유토피아주의가 아니다. 기술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리라고는 결코 믿지 말 것. 필요하다, 그렇다. 그러나 사회정치적 행동 없이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기술과 사회는 서로 긴밀히 얽혀 있고, 어느 한쪽의 변화가 다른 쪽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 강화한다. 기술 유토피아주의자들이 가속이 사회적 갈등을 자동으로 극복해 주리라는 이유로 가속을 주장한다면, 우리의 입장은 사회적 갈등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을 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8. 우리는 어떤 탈자본주의든 탈자본주의적 계획을 요구하리라고 본다. 혁명 이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본주의로의 회귀가 아닌 새로운 사회경제 체계를 구성하리라는 믿음은 잘해야 순진하고 나쁘게는 무지하다. 이를 진전시키려면 우리는 기존 체계의 인지 지도와 미래 경제 체계의 사변적 이미지를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9. 그러기 위해 좌파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능하게 한 모든 기술적·과학적 진보를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수량화가 제거해야 할 악이 아니라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할 도구라고 선언한다. 경제 모델링은 간단히 말해 복잡한 세계를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수학적 모델을 맹목적으로 신뢰할 때의 위험을 드러내지만, 이는 수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당한 권위의 문제다. 사회연결망 분석, 행위자 기반 모델링, 빅데이터 분석, 비평형 경제 모델에서 찾을 수 있는 도구들은 현대 경제 같은 복잡계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인지적 매개다. 가속주의 좌파는 이 기술 분야들에 능통해져야 한다.

10. 사회의 어떤 변형이든 경제적·사회적 실험을 포함해야 한다. 칠레의 사이버신 프로젝트는 이 실험적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앞선 사이버네틱 기술과 정교한 경제 모델링, 그리고 기술 기반시설 자체에 구현된 민주적 플랫폼을 융합한 시도였다. 1950~60년대 소비에트 경제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이루어져, 최초의 공산주의 경제가 맞닥뜨린 새로운 문제를 넘어서려 사이버네틱스와 선형계획법을 동원했다. 두 시도 모두 결국 성공하지 못한 것은 초기 사이버네틱스 연구자들이 놓여 있던 정치적·기술적 제약에서 비롯되었다.

11. 좌파는 기술사회적 헤게모니를 발전시켜야 한다. 관념의 영역에서도, 물질적 플랫폼의 영역에서도. 플랫폼은 지구적 사회의 기반시설이다. 그것은 행동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무엇이 가능한지의 기본 매개변수를 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랫폼은 사회의 물질적 초월론을 체현한다. 특정한 행동과 관계와 힘의 집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플랫폼이다. 현재 지구적 플랫폼의 많은 부분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쪽으로 기울어 있지만, 이는 필연이 아니다. 생산과 금융과 물류와 소비의 이 물질적 플랫폼들은 탈자본주의적 목적을 향해 다시 프로그래밍되고 다시 포맷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12. 우리는 직접행동만으로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행진하고 팻말을 들고 일시적 자율지대를 세우는 습관적 전술은 효과적 성공의 안락한 대체물이 될 위험이 있다. "적어도 우리는 무언가를 했다"는 효과적 행동보다 자존감을 앞세우는 이들의 구호다. 좋은 전술의 유일한 기준은 그것이 유의미한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우리는 특정한 행동 양식을 물신화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정치는 갈등과 적응과 역적응, 전략적 군비 경쟁으로 찢긴 동적 체계의 집합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는 개별 정치 행동이 상대가 적응함에 따라 시간이 지나며 무뎌지고 무력해진다는 뜻이다. 어떤 정치 행동 양식도 역사적으로 불가침이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겨누는 세력과 조직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반격하는 법을 익히는 만큼 익숙한 전술을 버려야 할 필요가 커진다. 동시대 좌파의 곤경에 가까운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13.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를 압도적으로 특권화하는 태도는 뒤로 물려야 한다. 오늘날 '급진' 좌파 상당수의 개방성·수평성·포용에 대한 물신화는 무력함의 무대를 마련한다. 비밀과 수직성과 배제 또한 효과적 정치 행동에서 제 자리를 가진다. 물론 그것이 유일한 자리는 아니다.

14. 민주주의는 그 수단으로, 곧 투표나 토론이나 총회로 단순히 정의될 수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그 목표, 곧 집단적 자기 지배로 정의되어야 한다. 이는 정치를 계몽의 유산과 나란히 놓는 기획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 사회적·기술적·경제적·심리적 세계를 — 더 잘 이해하는 능력을 활용해야만 우리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산된 수평적 사회성에 더해 집단적으로 통제되는 정당한 수직적 권위를 상정해야 한다. 폭압적 전체주의적 중앙집권의 노예가 되지도, 우리 통제를 벗어난 변덕스러운 창발적 질서의 노예가 되지도 않기 위해서다. 계획의 명령은 네트워크의 즉흥적 질서와 결합되어야 한다.

15. 우리는 어떤 특정 조직도 이 벡터들을 체현할 이상적 수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언제나 필요했던 것은, 조직들의 생태계, 곧 서로의 상대적 강점 위에서 공명하고 되먹임하는 힘의 다원성이다. 종파주의는 중앙집권만큼이나 좌파의 조종이며, 이 점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술의 실험을 계속 환영한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전술이라 해도 그렇다.

16. 우리에게는 세 가지 중기 목표가 있다. 첫째, 지적 기반시설을 세워야 한다. 신자유주의 혁명의 몽펠르랭 협회를 본떠,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경제·사회 모델, 그리고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여윈 이상을 대체하고 넘어설 좋음의 전망을 만들어 내는 일을 맡는다. 이는 관념뿐 아니라 그것을 심고 체현하고 퍼뜨릴 제도와 물질적 경로까지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기반시설이다.

17. 우리는 대규모 미디어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민주화를 가져온 듯 보이지만, 전통적 언론은 서사를 선택하고 틀 짓는 데서 여전히 결정적이며, 탐사보도를 수행할 자금을 쥐고 있다. 이 기구들을 가능한 한 대중의 통제에 가깝게 끌어오는 일은 현재의 사태 재현 방식을 허무는 데 결정적이다.

18.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계급 권력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런 재구성은 유기적으로 생성된 지구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미 존재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그 대신 흔히 포스트포드주의적 불안정 노동의 형태로 체현된, 흩어진 부분적 프롤레타리아 정체성들을 엮어 내야 한다.

19. 이미 이 각각에 매달리는 집단과 개인이 있지만, 저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셋이 서로에게 되먹임하면서 각자가 동시대의 국면을 바꾸어 다른 것들을 점점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기반시설과 이데올로기와 사회와 경제의 변형이 이루는 양의 되먹임 고리, 그리하여 생겨나는 새로운 복합 헤게모니, 새로운 탈자본주의적 기술사회 플랫폼이다. 역사는 체계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언제나 전술과 조직의 넓은 배치였음을 보여 준다. 이 교훈을 배워야 한다.

20. 이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가장 실천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가속주의 좌파가 효과적인 새 정치 기반시설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원과 돈의 흐름을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거리에 나선 몸들의 '민중의 힘'을 넘어, 우리에게는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에서든 기관에서든 싱크탱크에서든 노조에서든 개인 후원자에게서든. 그런 자금 흐름을 찾아내고 이끄는 일이야말로 효과적인 가속주의 좌파 조직의 생태계를 다시 세우기 시작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우리는 여긴다.

21. 우리는 사회와 그 환경에 대한 최대한의 지배를 추구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정치만이 지구적 문제를 감당하거나 자본에 승리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 지배는 초기 계몽의 사상가들이 아꼈던 지배와 구별되어야 한다. 충분한 정보만 있으면 쉽게 지배되는 라플라스의 시계태엽 우주는 진지한 과학적 이해의 의제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이는 지배를 원형 파시즘적이라 비난하고 권위를 본래 부당한 것이라 몰아세우는, 지친 포스트모더니티의 잔여물에 우리를 세우자는 말이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행성과 종을 둘러싼 문제들이 새롭고 복잡한 모습으로 지배를 다시 벼려 낼 것을 요구한다고 제안한다. 우리 행동의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어도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결과의 범위는 정할 수 있다. 그런 복잡계 분석에 결합되어야 할 것은 새로운 형태의 행동이다. 즉흥적이며, 행위하는 과정에서야 발견되는 우연들과 더불어 작동하는 실천을 통해 설계를 수행할 수 있는 행동, 곧 지리사회적 기예와 교활한 합리성의 정치다. 복잡한 세계에서 행위할 최선의 수단을 찾는 귀추적 실험의 한 형태다.

22. 우리는 탈자본주의를 위해 전통적으로 제기되던 논변을 되살려야 한다. 자본주의는 부당하고 뒤틀린 체계일 뿐 아니라 진보를 가로막는 체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술 발전은 자본주의에 의해 풀려난 만큼이나 자본주의에 의해 억눌리고 있다. 가속주의란 이 역량들이 자본주의 사회가 부과한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풀려날 수 있고 또 풀려나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이다. 현재의 제약을 넘어서는 운동은 더 합리적인 지구 사회를 위한 투쟁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19세기 중반부터 신자유주의 시대의 여명까지 수많은 이를 사로잡았던 꿈, 곧 지구와 우리의 직접적인 신체 형태의 한계 너머로 확장하려는 호모 사피엔스의 탐구를 되찾는 일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이런 전망은 더 순진했던 시절의 유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시대의 아연할 만한 상상력 부족을 진단하는 동시에, 정서적으로 활력을 주고 지적으로 자극하는 미래를 약속한다. 결국 20세기 중반 우주 계획의 약속어음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기술적 개량에 머무는 세계를 넘어 전면적 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가속주의 정치가 가능하게 하는 탈자본주의 사회뿐이다. 집단적 자기 지배의 시간을 향해, 그리고 그것이 함축하고 가능하게 하는 제대로 낯선 미래를 향해. 계몽의 기획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비판과 자기 지배라는 그 기획을 완성하는 쪽으로.

23.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가혹하다. 지구화된 탈자본주의냐, 아니면 원시주의와 영구적 위기와 행성적 생태 붕괴를 향한 느린 파편화냐.

24. 미래는 건설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해 허물어졌고, 더 큰 불평등과 갈등과 혼돈이라는 헐값의 약속으로 축소되었다. 미래라는 관념의 이 붕괴는,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는 냉소주의자들이 믿게 하려는 것처럼 회의적 성숙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퇴행적 역사 상태를 드러내는 증상이다. 가속주의가 밀고 나아가는 것은 더 근대적인 미래, 곧 신자유주의가 본래 만들어 낼 수 없는 대안적 근대성이다. 미래는 다시 한번 열어젖혀져야 한다. 우리의 지평을 바깥의 보편적 가능성을 향해 풀어놓으면서.

이 글은 Critical Legal Thinking (2013년 5월 14일)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원문 보기
Alex Williams and Nick Srnicek,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Critical Legal Thinking, 2013. CC BY-NC-SA 4.0에 따라 옮겼습니다. 이 번역본도 같은 조건으로, 비영리 목적에 한해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