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말고 그냥 편지 ― 지난 시간을 잘 갈무리하는 것에 대하여
10년 만에 해체를 결정하는 팀의 이야기를 보다가, 딱 10년이 된 우리를 떠올렸다.

지난 시간을 잘 갈무리하는 것에 대하여
우연한 기회로 〈콩트가 시작된다〉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게 되었어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맥베스 3인방은 '10년 후에도 잘 되지 않으면 해체!'라는 약속을 하고 콩트 팀을 꾸렸지만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마지막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극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는 쪽으로 결말이 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고 활동을 서서히 갈무리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10년 뜨겁게 사랑하고, 다음 페이즈로 넘어가기로 한 이들의 결정에 응원을 보내는 동시에 마침 딱 10년을 맞은 이김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꽤 싱숭생숭해졌습니다. 송찬과 함께 부둥켜 울기도 할 정도로요. '우리도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에도 정리할 용기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 번 편지에서처럼 편집자로 일하는 건 참 행복했는데, '과연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저희는 이제 중년이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가족들에게 짐이 된다거나 하진 않으니 저희에겐 좀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 싶습니다. 그래도 그동안의 10년을 잘 정리하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아요.
(계속되는) 갈팡질팡의 시간
처음 송찬이 진로를 정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기에, 자연스럽게 출판사는 과학책 출판에 가닿게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인들의 언저리를 맴돌며 과학자들의 태도를 많이 배웠어요. 자신의 연구대상을 사랑하고 이에 천착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웠고, 책을 매개로 그 크고 작은 주제들을 알릴 기회를 얻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과학 바깥의 관심 주제도 다루기도 했고, 가끔은 대중적인 성공을 노리고 계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일이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지만 무엇보다 불안했던 건 도서목록에서 출판사의 지향점이 또렷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걱정은 자기의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둘조차도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명확히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나 우리가 만들면서 좋았던 것은 역시, 미친듯이 몰두하는 이들의 기쁨을 건져올려 이런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야에 구애받지 않고, 멋있고 살짝 '도른' 기획으로 독자들에게 예측하지 못한 만남에서 오는 짜릿한 기쁨을 주자는 기조를 유지해 보기로 했습니다. 티가 안 난 것 같지만 우리 책에서 이미 볼 수 있는 것이었어요. 이러다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lean하게 간다고 치고!
배워야 늙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지난 11월 28일에 〈퍼블리셔스 리버스 멘토링〉이라는, 젊은 편집자들에게 기성 출판인들이 배우는 포럼에 참석했습니다. 많은 새로운 자극이 있었지만 특히 출판사 외부에 기대지 말고 내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라, 스스로 인플루언서가 되어보라는 도전에 응답하기로 하고 트위터(X)에 글을 막 올려 보았습니다. 음, 잘 된 것도 있고요, 안 터진 것도 많고요. SNS는 사실 할 말이 많지 않은 대면형 외향인인 저에게는 좀 힘든 것 같긴 합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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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면형 행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디스이즈텍스트: 논픽션 북페어〉인데요. 저희처럼 인문, 사회, 과학, 철학, 예술 등 인문교양 논픽션을 진지하게 만들어 온 출판사들과 진지한 책을 읽는 독자들이 다른 무언가가 아닌 그저 책을 매개로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지금은 참가사 모집 중인데요, 생각보다 많은 출판사에서 지원해 주셔서 이제서야 '일이 커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월 31일(토)~2월 1일(일) 서울시청 근처에 있는 알라딘빌딩 1층에서 합니다. 그 알라딘 맞습니다! 저희가 출판사로서 첫 발을 딛는 데 큰 도움을 주셨을 뿐 아니라 디스이즈텍스트 론칭에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계신답니다. 북페어는 시간제 예약제로 열리고요, 1월 중순 쯤부터 관람객 모집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책 자체와, 책에 얽힌 이야기라는 한정판 독서 경험을 선사할 테니, 많은 관심 가지고 방문해 주세요. 디스이즈텍스트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우하시면 소식 전할게요.
단상
- 사실 올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하다 보면 끝이 난다"는 것이었어요. 쌓인 일들 하나하나씩 쳐내고 나니 12월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이 업무로 복잡할 때는 일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인 뉴그라운드의 (주간) 체크아웃타임에 참여하며 회고와 계획을 통해 정리할 수 있었어요.
- 12월 13일(토)에는 제가 오래 활동중인 과학기술인 시민단체 ESC 송년회 프로그램인 "전지적 과학책 시점"에서 종합출판인 패널로 출동합니다.
- 1월에는 피터 고프리스미스의 첫 책인 『아더 마인즈』 개정판이 나옵니다. 훨씬 매끄러운 글로 문어와 조우해 보세요.
- 이 글에 쓰인 약물은 〈편집자의 친구, 편친〉이라는 웹페이지에서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이 서비스를 개발하고 알음알음 혼자 사용하다 얼마 전에 X에서 한번 도는 바람에 이김 편집자는 X 인플루언서가 되었습니다(거짓정보).
메일을 이렇게 한참 쓰고 나면 너무 저희 얘기만 많이 한 기분이 듭니다. 특히 출판사가 대단히 멋있고 잘 하고 있다는 내용보다는 맨날 고민이 많다는 얘기만 하는 게 좀 피곤하시진 않을까 걱정이 돼요. 하지만 이 메일을 단체로 보내지만 단체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안부에 진심이거든요. 그러니 답장으로 소식 전해 주세요. 2025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 남은 20여 일 어떤 재밌는 계획이 있으신지, 2026년 일출은 보러 가실 건지, 그리고 언제 망원에 놀러오실 건지 등등요. 답장 기다릴게요. 추운 겨울 적당히 따뜻하고 많이 건강하게 보내세요!
2025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미선과 송찬과 마로 드림
이 글은 이김의 뉴스레터 말고 그냥 편지 NO. 3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