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네틱 주의력 ― 우리가 지켜보는 법을 배운 기계들이 우리를 굽어본다
우리가 잃었다고 여기는 주의력과 하루 종일 화면에 붙들려 있는 주의력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요즘 우리는 주의력을 걱정한다. 거의 모두가 그렇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눈과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내지 못한다. 적어도 오래는 못 한다. 자꾸만 기계로, 화면으로, 알림으로, 깜빡이는 커서와 피드를 새로 고치는 매끄러운 스와이프로 돌아온다.
화성에서 온 인류학자가 우리 사이를 돌아다닌다면 — 우리가 알아채기나 할까? — 이 불평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주의력에 문제가 있다고? 저들은 하루 종일 작고 알록달록한 유리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저들의 주의력은 숭고할 지경인데!"
그리고 이 오해가 오히려 요점을 날카롭게 한다. 우리는 기계와 계속 맞물려 반응하는 형태의 주의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복잡한 장치의 끝단에서 제시되는 이런저런 자극에 지속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누르고 두드리는 일에 우리는 놀랍도록 능하다. 기묘하고 몰입적인 우리의 사이버네틱 주의력은 이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이다. 반면 우리의 인간적 주의력 — 자기 자신과 함께, 또 타인과 함께 있는 능력, 마음과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능력, 몽상에 잠기고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고 해 지는 것을 바라보는 능력 — 에 대해서라면, 많은 이가 그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떠올리기 어려워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일련의 정교한 실험실 연구 프로그램들이 인간의 주의 능력을 잘게 썰고 나누는 일을 해 왔다. 목적은? 비행기를 격추하고 레이더 화면을 감시하고 그 밖에 크고 값비싼 기계의 조종석에 앉을 사람들의 작전 수행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계기 앞에 앉은 피험자들은 듣고 보고, 추적하고 방아쇠를 당기라는 요구를 받았다. 심리학자들은 초시계를 들고 곁에 서서 우리의 사이버네틱 능력을 수치화하고 그것을 늘릴 방법을 찾았다. '주의력 경제'가 만개한 시대에 성장한 우리로서는, 인간 안구의 움직임이 어떻게 정밀한 관찰 대상이 되었는지, 기계에 대한 각성이 어떻게 하나의 연구 분야가 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이 흥미롭다. 그 실험실에서 해부된 기계형 주의력이야말로 우리의 온라인 생활에서 끊임없이 값이 매겨지는 바로 그 기계적 주의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해로운 결과와 함께.
이 과정이 '추적 검사pursuit test'라고 알려진, 매혹적이지만 지금은 대체로 잊힌 도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스팀펑크 비디오게임이고 한편으로는 실험실판 스너프 필름인 이 추적 검사는, 20세기의 첫 수십 년에 걸쳐 인간과 기계의 통합을 무대에 올리고 또 올렸다.
그런 장치의 초기 사례가 하나 남아 있다. 기계에 밝았던 미국 심리학자 나이트 던랩(1875~1949)이 제1차 세계대전 중 항공대 의학연구소에서 일하며 개발한 정교한 장치다. 조종사를 평가하는 데 쓰인 주의력 훈련 시스템, 추적 검사의 '베타 빌드'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던랩은 비행사들의 주의 능력을, 특히 전투를 상정한 동력 비행이라는 극단적 생리 조건 아래에서의 주의 능력을 각별히, 그리고 목소리 높여 걱정했다. 그가 군의 세계에서 주의력을 더없이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보기에 주의력은 심리학이 전투 조종사의 선발과 훈련을 직접 도울 수 있는 핵심 영역이기도 했다.
비행사가 다른 모든 반응을 그 순간의 결정적 반응에 종속시킬 수 있는 정도, 그리고 눈앞의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부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경계를 계속 지배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흔히 말하는 주의 지속력)뿐 아니라, 통합에서의 적절한 균형(한 상황 속 여러 개별 세부에 효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 또한 매우 주의 깊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던랩이 이 일반적 주의 '통합'을 시험하려고 개발한 시스템은 일종의 주의력 부하 검사였다. 어떻게 작동했을까? 피험자 앞에 열네 개의 자극등이 달린 판과 열네 개의 작은 놋쇠 핀을 놓는다. 등 하나가 켜질 때마다 피험자는 작은 금속 스타일러스로 그 옆의 핀을 건드려야 한다. 그런데 핀은 저마다 금속 와셔에 둘러싸여 있어서, 손놀림이 엉성해 와셔를 스치면 '실패'가 되고 오류로 집계되었다. 이 부분은 어린이 게임 '오퍼레이션'의 고위험 버전처럼 작동한 셈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전체 시험판에는 작은 전류계도 있었는데, 여기에 가변저항기 두 개가 연결되어 하나는 실험자가, 다른 하나는 피험자가 조작했다. 둘은 서로를 상쇄할 수 있어서, 실험자가 전류계 바늘을 한쪽으로 끌면 피험자는 자기 다이얼을 조작해 바늘을 가운데로 되돌려야 했다. 그리고 후보생이 동시에 처리해야 할 세 번째 '문제'가 또 있었다. 탁자 위에 작은 모터가 놓여 있고 실험자가 스위치를 넣으면 회전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는데, 피험자는 탁자 밑에 놓인 페달을 밟아 속도를 되돌리려 애썼다.
이십오 분 동안 후보생은 불 켜진 판을 감시하고, 모터를 최고 속도로 유지하고, 전류계 바늘을 평형에 붙들어 두면서, 동시에 서서히 산소를 빼앗겼다. 당연히 훨씬 어려워졌다. 피험자는 '재호흡기'를 착용했는데, 이는 폐쇄 순환식 호흡 장치, 곧 점진적 질식 기계나 다름없었다.
던랩 같은 실험심리학자들은 초기 비행사들과 일하면서, 주의력을 관찰하는 실험실 시스템을 동적이고 단계적이며 궁극적으로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도구로 다시 구성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에 걸친 집중 제어의 연쇄를 감시하고 평가할 수 있는 도구로 말이다. 추적 검사는 이 새로운 주의력 문제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던랩의 초기 장치는 피험자를 실제 실험자와 '맞붙였다'. 피험자가 반응해야 할 전류계를 실험자가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추적 검사는 자극을 자동화했고, 그리하여 인간 피험자를 순전히 기계적인 시련과 맞세웠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미국 심리학자 월터 R. 마일스(1885~1978)가 1920년대 초에 발명한 마일스 '추적계Pursuitmeter'였다.
실험실의 일급 땜장이였던 마일스는 추도사에서 20세기 전반 심리학의 "지고의 장치광"으로 기억되었다. 억누를 수 없는 설계 취향으로 그는 놀라운 장치를 발명했는데, 이는 인간이 동적인 기계 장치와 긴밀한 관계에 들어서는 능력을 훈련하고 평가하는 데 쓰일, 점점 더 정교해지는 아날로그 피드백 시스템 계보의 시조로 이해할 수 있다. 추적계의 핵심에는 단순한 슬릿 조준창이 있었고, 피험자는 거기에 온 주의를 모았다.
슬릿 창 표면에는 수직의 흰 선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선을 가로지르는 흰 점은 움직인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겉보기에 무작위로 좌우로 흘러간다. 내부의 시계 장치 프로그램이 그것을 움직인다. 이를 지켜보는 피험자는 가변저항기 손잡이를 좌우로 밀어 점의 이탈을 상쇄하는 방식으로 그 흐름을 '교정'할 수 있다. 기록 장치가 '커서'와 '조준선' 사이의 거리를 종이에 남기는데, 이 거리는 피험자의 집중력 및 손놀림과 음의 상관을 가진다고 이해되었다. 피험자는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스템을 최대한 '조준 상태'로 붙들어 두려 애쓴다.
마일스의 실험에서도 피험자는 다시금 일련의 '질식' 실험 가운데 하나를 겪었다. 산소가 줄어든 조건에서 지속적 주의와 운동 반응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설계된 실험이다. 보조 산소 없이 비행하던 조종사들에게는 표준적인 문제였다. 보조 산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시스템은 사이버네틱 통합을 위한 기묘하고 새로운 시험대를 만들어 냈다. 추적계는 눈과 손과 마음과 기계의 길게 늘어진 춤을 명백하게 무대에 올렸다. 실은 이것을 진짜 '키잡이'가 놓인 통상의 상황을 뒤집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어 키베르네테스kybernētēs에서 '사이버네틱스'가 나왔다. 비행기 조종사가 세계의 실시간 교란에 반응하는 시스템을 조종하는 입력을 넣는다면, 추적계는 각본을 뒤집는다. 기계가 자기 프로그램에 부호화된 일련의 반응을 통해 인간을 '조종'하면서, 기계의 지시를 따르는 인간의 능력을 평가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시공간적 항상성이라는 일반적 문제의 '시뮬레이션'이다. 균형을 잃지 않게 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로봇판 '사이먼 가라사대'다.
커서에 눈을 붙박고 손가락으로 그 움직임을 좇는 피험자를 보고 있으면 — 시야가 흐려지고 의식이 서서히 몽롱한 트랜스로 잠겨 드는 동안 — 우리는 미래를, 곧 눈이 풀린 채 기계 지대로 점점 더 깊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우리 자신을 언뜻 본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을 기계 앞에 앉히고 따라오라고 요구해 온 긴 역사의 결과다.
요즘 우리는 주의력을 걱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걱정하는 것은 사이버네틱 주의력, 곧 추적 검사의 주의력이다. 자극에 붙박인 눈, 반응하며 움직이는 손가락. 그리고 실제로 그 조종사 시험 장치들과 오늘날 주의력 경제의 클릭과 탭을 잇는 직선이 있다. 추적 검사는 실험심리학의 역사의 일부였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감각적·심리적 특징을 수량화하고 측정하려던 실험실 노력의 일부였다. 주의력은 이 사업에서 일찍부터 전면에 올랐고, 그 실험실에서 관찰 대상이 된 주의력은 도구적이고 작전적인 주의력, 곧 계기로 끌어내고 평가할 수 있는 종류의 주의력이었다. 군산복합체의 기계 생태계에서 이런 형태의 주의력이 아무리 중요했다 해도, 이 도구들이 가장 중대한 쓸모를 찾은 곳은 큰돈이 오가기 시작한 광고의 세계였다. 미국인들의 라디오 다이얼을 감시한 닐슨 '오디미터'에서부터 시선 하나하나의 '주의 가치'를 수량화한 점점 강력해지는 시선 추적 시스템까지, 주의력을 계측하는 장치들은 주의력 경제의 엔진이 되었다.
그 모든 빠른 반응의 주시, 기계 인터페이스에 대한 그 모든 지속적 헌신은 정말 '주의력'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그런 행동 능력을 '주의력'이라 불러도 좋고, 그런 주의력에 관해 동료 심사를 거친 과학 문헌을 얼마든지 생산할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이 측정하기 쉽고, 따라서 과학과 의학이 귀하게 여기는 정량 분석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읽기 또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이며, 다만 정량적으로 평가하기가 더 어렵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사랑. 사랑 또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이지 수량화가 잘 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주의력 위기'에, AI가 몰아붙이는 주의력 경제의 격렬한 '인간 프래킹'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는 한 가지 방법은, 사이버네틱 주의력은 그저 그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잠시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주의력은 다른 무엇이라는 사실을. 후기 근대에 편재하는 추적 검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이 글은 The Public Domain Review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원문 보기
D. Graham Burnett, “Cybernetic Attention: All Watched over by Machines We Learned to Watch”, The Public Domain Review, 2026. CC BY-SA 4.0에 따라 옮겼으며, 이 번역본도 같은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원문의 도판을 싣지 않아, 도판을 가리키던 세 문장은 그림 없이도 읽히도록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