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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그림 ― 호기심의 방에서 갤러리 회화로

그림을 그린 그림이 있었고, 그 안에서 미술관이 태어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테아 애플바움 리히트2026. 7. 30.
그림과 조개껍데기, 주화와 화석이 빼곡한 17세기 수집가의 방을 그린 회화
소小 프란스 프랑컨, 「그림과 조개껍데기, 주화, 화석, 꽃이 있는 수집가의 방」(1619). 본문에 나오는 그림이다

「수집가의 방」(1617)이라는 그림에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친밀함이 있다. 아름다운 것들로 빼곡한 이 방으로 혼자 이끌려 들어온 듯한, 가까운 느낌. 어지러울 만큼 많은 이미지와 물건이 걸린 벽은 손을 뻗어 만져도 될 것처럼 놓여 있다. 먼 바다에서 온 말라붙은 생물들이 느슨한 스케치 위에, 깊이 들어앉은 무성한 풍경화들 사이에 핀으로 꽂혀 있다. 유리 상자 안에서는 작은 동물 형상들이 쌓인 주화 곁에서 빛을 받고, 고전풍 옆얼굴들이 반짝인다. 강제 원근법의 솜씨로 반들거리는 조개껍데기와 상어 이빨이 탁자에서 보는 이 쪽으로 튀어나온다. 무겁고 서늘할 것 같다. 이 펼쳐짐은 아찔하고, 시각적인 성찬이다. 그런데 오른쪽, 열린 문 너머에서는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수집품이 거기 어질러져 있다. 지구본, 류트, 부서진 조각상, 책들과 화가의 팔레트. 몇몇 인물이 그 난장 위에 거들먹거리며 서 있는데, 무표정한 긴 귀의 당나귀 머리 위로 몽둥이를 치켜들고 있다.

당나귀 머리를 한 이 훼방꾼들은 잠시 접어 두자. 화가인 플랑드르의 소小 프란스 프랑컨(1581~1642)이 우리를 맞아들인 이 공간은 수집가의 방이다. 갤러리와 참고 도서관의 성격을 함께 지니면서, 그 둘의 근대적 의미보다 앞서는 축적물이다. 독일어로 분더카머 혹은 쿤스트카머라 불린 이 방들은 16~17세기라는 시대에 매우 충실한 개인 수집가의 감각을 반영한다. 귀한 자연물과 인공물을 모아 놓은 이 집합은 아름답고, 희귀하고, 지적으로 자극적인 것을 동시에 노렸다.

준백과사전적이면서 본질적으로 미학적이었던 초기 수집가의 방은 자연과 비자연 사이에도, 세속과 종교 사이에도 실질적인 선을 긋지 않았다. 조직 원리라 할 것이 있었다면 서로 닮지 않은 물건들을 부딪히게 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과학사가 로레인 대스턴의 표현을 빌리면, 노린 효과는 "풍요의 뿔처럼 넘치는 풍성함과 놀라운 다양성, 자연과 기예의 넘쳐나는 창조성에 바치는 시각적 헌사"였다. 당시의 자연철학은 훗날 별개의 분야로 굳어질 것들 — 예술, 과학, 신학 — 을 모두 품을 만큼 넉넉했다. 쿤스트카머의 내용물은 넓은 의미의 연구 대상이었고, 그 방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관조의 무대였다. 동시에 이 공간은 수집가의 안목과 부와 분별력을 내보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연구자 마를리서 레이크스는 자연물과 과학 기구와 미술품을 소유한다는 것이 "그 물건들이 대표하는 지식을 가졌음"을 알리는 신호였다고 쓴다. 알려진 가장 이른 수집실 이미지는 나폴리 약제사 페란테 임페라토의 자연사 컬렉션을 그린 1599년 목판화인데, 이탈리아의 감식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은 표본들을 가리키고 있다.

17세기가 흐르면서 호화로운 쿤스트카머를 꼼꼼하게 묘사한 그림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가장 뛰어난 예 가운데 하나인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렘프스의 「호기심의 방」은 1690년대 작품으로, 취향 있게 어질러진 수집품이 내놓는 볼거리를 엿보게 한다. 눈속임 기법으로 그려진 문자 그대로의 캐비닛 안에 진홍색 산호와 깃털, 작은 그림들과 정교한 상아 조각이 가득하다. 광택 나는 유리가 번쩍이는 헤라클레스장수풍뎅이, 눈구멍이 빈 얼룩진 사람 두개골과 시선을 다툰다.

수집실 그림 가운데 다수는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진열을 담고 있다. 화가들은 자기 소장품에서 예를 골라 왔거나 — 프랑컨의 몇몇 그림이 그랬을 것이다 — 주문한 후원자의 더 넓은 소장품에서 가져왔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 참조물들을 짜맞춰 호사스러운 정물로 만들었다. 이런 그림의 구성 자체가 감식 행위였고, 취향과 지식의 과시였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수집이었다.

쿤스트카머와 그 재현물이 구현한 덕목 — 박식, 취향, 부, 인맥 — 은 당나귀 머리를 한 속물들이 왜 거기 있는지 설명해 준다. 비유는 단순하다. 수집품이 보이는 자리에서, 자유교양의 환유들이 무지의 오랜 상징인 당나귀의 발과 몽둥이 아래 짓밟히고 있다. 16세기 내내 물질성과 우상숭배를 둘러싼 종교개혁의 논쟁이 격해지면서, 종교적 이미지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시각예술 일반이 공격받았다. 동시에 종교적 동기에서 나온 물질적 부에 대한 경계가 호화로운 수집품 — 저지대 지방과 그 너머에서 유행하던 — 과 사치를 부추기는 듯한 이미지 양쪽을 겨눴다. 말 탄 성상파괴자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프랑컨 일가는 "이미지의 옹호자"로서 강한 입장을 취했다. 개혁가들의 예술 거부가 자유교양 전체를 위협한다는 시각적 주장이었다.

프랑컨 공방은 이 "성상파괴 당나귀" 모티프를 여러 그림에 되풀이했다. 「수집가의 방」(1619)이 그렇고, 학식 있는 자들을 내리치려는 불만에 찬 당나귀를 그린 17세기 그림도 그렇다. 언제나 수집실과 함께였다. 프랑컨 가문에게 이 문제는 개인적이고 뼈아프게 현재적이었다. 수집실 그림이라는 장르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이들은 안트베르펜의 반종교개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6세기 말 "조용한 성상파괴" 시기에 겪은 불만을 기록으로 남겼고, 종교적 이미지와 물건을 집에 숨겨 지켰다.

17세기가 흐르며 수집가의 방은 점점 전문화되었다. 이국의 자연물을 곁들이지 않고 미술품만으로 채워진 방이 늘어났다. 레이크스는 이를 시각예술에게 양면적인 전개였다고 본다. "그 결과는 승리이기도 했다. 미술품 수집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패배이기도 했다. 지식의 전달자로서 미술이 지니던 중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미학적 나선이 점점 감기듯, 이 초기 갤러리들은 그 자체로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림을 그린 그림, 미술의 미술이다. 안트베르펜은 늘어나는 메타 이미지들의 진원지가 되었다.

호기심의 방을 그린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갤러리 그림도 실제 소장품을 충실히 옮긴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미술품들은 — 실재하는 것도, 때로는 완전히 지어낸 것도 — 화폭 위에서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그 자체가 큐레이션 행위였고, 흔히 알레고리에 봉사했다. 예컨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시각」(1617)에서는 베누스와 쿠피도가 미술품과 과학 기구가 뒤섞인 더미와 나란히 놓인다.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폭넓은 성찰이다. 여기에는 라파엘로의 「성 체칠리아의 법열」과 루벤스 자신의 「호랑이 사냥」이 신고전풍 흉상들, 바다 풍경화를 들여다보는 원숭이, 그 밖의 잡다한 진귀품 사이에 놓여 있다.

18세기 중반의 그림 「화가의 작업실」에서 오스트리아 화가 요한 게오르크 플라처(1704~61)는 자신의 널리 알려진 작품들 — 「사계의 즐거움」이나 「봄」 같은 — 을 암시하는 이미지들과 미술사의 모티프들, 이를테면 이솝의 「사티로스와 농부」를 그린 그림으로 어수선한 작업실 한가운데 자신을 그려 넣었다. 조수들, 학생들, 누드 모델, 방문한 수집가가 이미지의 빽빽한 숲 속으로 사라진다. 두드러진 그림들을 한데 놓고 보면 오감의 알레고리를 이룬다.

1754년에서 1757년 사이에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 조반니 파올로 파니니(1691~1765)는 거의 똑같고 완전히 환상인 고대 폐허 갤러리를 네 점 연작으로 그렸다. 조각들은 실재하지만 — 이를테면 저 유명한 라오콘 군상 — 그림들과 갤러리 자체는 허구다. 반드시 봐야 할 로마 유적의 여행 안내서인 셈이다. 판테온, 콜로세움, 나보나 광장. 그랜드 투어의 스냅사진들을 거대한 기억의 궁전에 담았다. 파니니의 후원자였던 프랑스 외교관이 안내서를 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대체로 갤러리 그림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시각적 목록이자, 소유와 진열을 그림으로 옮긴 색인 역할을 했다. 플랑드르 화가 빌럼 판 하흐트(1593~1637)는 갤러리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1621년의 「오스트리아 대공비 이사벨라의 살롱 내부」도 그중 하나다. 그는 대공비가 쨍한 대낮의 빛 속에서 자신의 소장품 가운데 앉아 있는 모습을 담았고, 액자 하나하나가 과할 만큼 선명하게 밝혀져 있다. 수행원들이 천문 기구가 놓인 탁자를 두고 의논하고 — 과학이 미술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후대의 갤러리 그림과 대비된다 — 그림의 세부를 가리킨다. 열대 새 두 마리가 마치 또 하나의 미술품처럼 곁에 놓이고, 사슬에 묶인 작은 원숭이가 애완견과 마주선다. 1628년 판 하흐트가 상인 코르넬리스 판 데르 헤이스트의 소장품을 재현한 그림은 규모가 또 다르다. 스물 몇 명이 넘는 인물이 몰려 있고, 삼층 높이에 가까운 그림들 앞에서 작아 보인다.

후원자였던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소장품을 십 년에 걸쳐 목록화하면서, 플랑드르 화가 소小 다비트 테니르스(1610~90)는 고른 작품만 다를 뿐 거의 서로 바꿔 놓아도 될 갤러리 그림 연작을 만들었다. 모두 똑같거나 거의 똑같은 방을 무대로 한다. 벽에 자리가 떨어지면 테니르스는 액자를 바닥에 세우고, 서로 기대어 놓고, 천장에 매단다. 이미지 하나하나가 기록물처럼 정확하게 포착된다. 후원자인 빌헬름은 매번 등장해, 길고 가는 지팡이를 짚고 그림의 숲을 헤쳐 나간다. 수행원들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1770년대에 그려진 독일 화가 요한 초파니(1733~1810)의 우피치 트리부나 그림은 아마도 이 피렌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방을 다룬다. 팔각형의 이 방은 그 진열이 분더카머의 감각을 반영한다고 이야기되어 왔다. 초파니가 쌓아 올린 미술품 더미에서 뚜렷한 메시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중 일부는 복합 건물 안 다른 전시실에서 끌어온 것이다. 무언가를 상징한다면, 이 그림은 그저 우피치의 풍요로움에 대한 암시로 읽어도 좋다. 붉은 벽을 그림이 뒤덮고 여러 색 융단 위에 작품이 쌓여 있으며, 분 바른 가발과 반들거리는 반바지 차림의 영국인 애호가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그 효과는 용의 보물 더미 같다.

점점 이 그림들은 날짜가 특정된 전시와 이름이 있는 갤러리의 장면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판화가 피에트로 안토니오 마르티니(1738~97)나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조제프 에임(1787~1865) 같은 후대의 작가들은 루브르 같은 큰 미술관의 전시를 충실한 세부까지 기록하며 경력을 쌓았다. 한 세기가 더 지나 화가 엔리코 메네겔리(1853~1912)는 보스턴 애서니엄 같은 미국 갤러리의 내부를 담았다. 어둑하고 침침하며 관람객이 없는 공간들이다. 어떤 작품은 기량의 과시다. 유화는 진열만이 아니라 갤러리 공간의 치솟는 아치와 기둥까지 붙잡았다. 한편 촘촘한 해칭과 점묘로 짜인 에칭은 널리 알려진 전시를 손쉽게 복제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 냈다. 판화가가 재량껏 작품을 더하거나 빼는 식의 창작적 자유는 목적에 어긋났을 것이다. 이 작업은 거의 저널리즘에 가깝다. 그 자리에 없는 독자를 위한 보도인 것이다.

유럽과 그 바깥의 다양한 "그림을 그린 그림"에서 몰입한 관람객의 존재는 거의 어디에나 있다. 이 이미지들은 흥미로운 시대를 따라 그렸다. 갤러리 그림은 미술관의 탄생과, 길고 더딘 미술의 민주화를 목격했다. 한때 "캐비닛"이라는 말은 사적임과 권위를 강하게 함축했다. 아름다운 이미지나 물건이 집안의 남성적 중심부에 보관되었다면, 그것을 눈으로 볼 사람은 극히 적었다. 가장 — 수집가 본인 — 을 빼면 개인적으로 초대받은 이들만이 감탄하고 사색하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수집품과 그 관객은 급격히 늘어났다. 개인의 집과 종교 건물만이 미술품의 보관소인 시대는 끝났다. 대신 미술관과 살롱이 점점 잡다해지는 군중을 맞이했다.

후대의 갤러리 그림에서는 벽을 향해 손짓하는 미술 애호가 무리가 우스울 만큼 불어나고, 작품 쪽은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앞선 "그림을 그린 그림"에 나오던 몇 안 되는 방문객 — 수집가와 그 가족, 몇몇 귀한 손님, 때로는 주문받은 화가 자신 — 은 부풀고 무질서한 군중에게 자리를 내준다. 마르티니와 에임의 그림에는 수십, 아니 수백 명의 들뜬 관람객이 들어찬다. 1824년 에임은 루브르 살롱에서 「샤를 10세가 예술가들에게 상을 수여하다」를 그렸다. 빛나는 흰색과 검은색 차림의 백 명이 훌쩍 넘는 잘 차려입은 인물들이, 뒤편 그늘에 웅크린 그림들보다 수적으로 쉽게 앞선다. 그리고 진열을 보려고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1790년대에 그려진 네덜란드 화가 아드리안 더 렐리(1755~1820)의 「요세퓌스 아우구스티뉘스 브렌타노의 화랑」은 어느 수집가의 호화로운 암스테르담 저택에 모인 손님들을 담았다. 희미한 빛줄기가 최근 구입품을 들여다보는 브렌타노와 일행의 집중한 표정을 골라내는데, 정작 그림들은 대체로 빗나가 흐릿한 얼룩으로 남는다.

읽을 수 없는 이미지와 몰입한(혹은 산만한) 군중의 짝은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1935년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우리가 예술을 "산만함과 집중"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경험한다고 쓴다. 그는 예술 감상에 대한 옛 계몽적 이상, 즉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내성적인 무언가를 불러온다. "예술작품 앞에서 집중하는 사람은 그것에 흡수된다"고 그는 쓴다. "반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을 흡수한다." 그는 영화와 사진에서 — 기계적 복제를 통한 예술의 대량 소비에서 — 산만함의 위험을, 수동적 소일거리의 위험을, 기성품 같은 의견의 위험을 본다.

벤야민은 원본의 "아우라", 곧 그 진품성과 유일성, 역사적인 "시공간 속의 현존"을 이야기한다. 복제는 우리를, 더 많은 사람을 작품 가까이 데려갈 수 있다. 그러나 아우라는 충실하게 복제되지 않는다. 벤야민에게 아우라는 작품의 제의 가치에 뿌리를 둔다. 그것은 제의 대상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종류의 가치다. 수도원에 갇힌 성상의 종교적 무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의 무게 — 그리고 집 안에 닫혀 있던 사적인 호기심의 방까지도. 시간이 지나고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먼저 주술의 도구"이기를 그치고 대신 전시 가치를, 구경거리로서의 예술을 획득한다.

"그림을 그린 그림"은 이 이분법들 사이 어딘가에 놓여, 벤야민이 말한 위기의 단층선을 훨씬 이른 역사에서 감지하게 해 준다. 예술이 있어 온 이래로 그것을 복제하려는 의지와 방법이 있었다. 그림을 그린 그림, 소묘를 그린 소묘, 오목판화를 새긴 오목판화. 전시와 산만한 소비의 장면을 그리면서도, 갤러리 그림은 그 나름의 제의 가치를 지닌다. 그것이 베껴 담은 작품들 앞에 서는 경험을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갤러리 그림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경험할 수는 있다. 이 그림들은 수작업 복제의 시대에서 왔으면서도, 영화와 사진의 등장이 낳을 철학적 물음을 어쩐지 미리 품고 있다.

무한한 디지털 복제의 세계인 오늘날에도 미술관은 여전히 사람으로 찬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예술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을 반대할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성상파괴자뿐일 것이다. 그려진 수집실과 그려진 갤러리에서, 그리고 온라인 예술의 세계에서 진품성과 아우라를 둘러싼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산만함과 수동성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군중과 복제라는 도전에, 인공적인 것을 둘러싼 임박한 우려에 맞서, 큐레이션과 선택과 배열이 지닌 구원의 성질이 떠오른다. 복제와 재현으로 채워져 있음에도 수집실 그림은 그 자체로 작품이며, 저만의 아우라를 지닌다. 그리고 오늘의 디지털 큐레이션에서, 온라인 공간의 그 친밀함 속에서, 어쩌면 아직 찾아낼 수 있는 호기심의 방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The Public Domain Review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원문 보기
Thea Applebaum Licht, “Art in Art: Cabinets of Curiosity and the Rise of the Gallery Painting”, The Public Domain Review, 2025. CC BY-SA 4.0에 따라 옮겼으며, 이 번역본도 같은 조건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